자줏빛 바다에 줄무늬가 언뜻 보여 내심 파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줄무늬는 꽝꽝 언 것처럼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건 파도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생긴 줄무늬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바다는 역시 멀었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움직이는 것도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이를테면 달도 움직이고 있는데 멈춘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파도가 치지 않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고 비릿한 해초 냄새도 물고기 죽은 냄새도 나지 않는 곳을 바라보니 역시 바다는 분명히 멀리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집”이라고 한 친구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바다가 ‘보이는’ 곳이긴 해도 멀다는 사실. 거기에 불만은 조금도 없었다. 수영을 즐기지 않기에 바다 따위 가깝든 멀든 상관없었고 오히려 먼 쪽이 신경도 쓰이지 않고 훨씬 좋았다.
O 안을 새까맣게 칠해 봤다. 그랬더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에이 씨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어 하나를 읽는 데도 숨이 차서, 힘들어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다음 단어에는 거의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적어도 나는 단어 하나하나의 낯선 감촉에 충실한 편이고 지금은 그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너편 강변에 던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체를 다 생각할 여유는 없다. 전체는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번역이란 것이 ‘건너편 강변에 건네는 것’이라면 ‘전체’쯤은 잊어버리고 이렇게 작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번역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변신 같은.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선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분명히 서투른 번역가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몹시 무서울 때가 있다.
“아, 성 게오르크가 용을 무찌른 그 전설이요?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고르셨어요? 뭐 보편적이긴 하지요.” 라고 편집자는 말했는데 그날 전화로 들은 목소리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성 게오르크가 등장해서 용을 죽인 다음 공주를 살리지요. 그런데 혹시 말씀하시는 이야기가 영웅이 원래는 겁쟁이였다든가 용도 원래는 없었다는 식의 현대식 이야기 아닌가요? 아니면 싸우는 사람이 공주였다든가요.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들. 지금은 페미니즘 시대잖아요.”
나는 모욕이라도 받은 듯 서둘러 반박했다.
“아뇨. 절대 그런 이야기 아닙니다. 정말로 성 게오르크가 나와서 용하고 싸워요. 공주를 현대식으로 바꿔 쓰지도 않았고요. 저는 그런 식으로 바꿔 써서 손쉽게 해결해 버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바꿔 쓰는 일이 아니라 번역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편집자는 예상대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그게 어디가 재미있어요?” 하고 다시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반사적으로 “ 불 . 쑥 . 나오는 것이 있어요.” 하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열정적인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물러설 수 없게 돼 버렸다.
줬을 텐데, 작은 보호구역을, 질서 정연하게, 점점, 죽을 수 있는, 그러긴커녕, 이, 괴물부터, 조차, 짜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예를 들어, 털을 깎는다, 양같이, 우유를 짜낸다, 멋있는, 깃털을, 한 올 한 올, 잡아 뜯어 주겠다, 가죽을, 뜯어내 주겠다, 귀 뒤에서, 깡그리, 그리고, 계란을, 들어서, 구워 주겠다, 데쳐 주겠다, 냉동을 해서, 그걸 사용해서, 최음제로 만들겠다….
다시 던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디를 향해 무엇을 던지고 있는지 잘 모를 뿐이었다.
나는 건너편 강변을 향해 돌을 계속 던졌다. 강에는 물이 없었으나 발이 젖어서 차가웠다. 건너편 강변에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내가 던진 돌을 줍더니 파란색 반투명 비닐봉지에 담아 모았다. 내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신발 속에서 참방참방 물소리가 들려 거치적거렸다. 물을 꺼리진 않지만 소리가 시끄러워서 주의가 영 산만했다. 신발을 벗어 거꾸로 해서 흔들어 봤다. 그랬더니 속에서 마른 돌멩이들이 후두두 떨어졌다.
“번역 힘들지요.”
우체국 직원이 그런 말을 하니 나도 그만 쓸데없는 말을 해 버렸다.
“네. 피부가 약해서요. 알레르기 체질이거든요.”
“그건 드문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녜요.”
“저도 늘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른 말로는 절대로 번역되지 않는 책도 있습니까?”
“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책이 그렇지요.”
“번역본밖에 남아 있지 않은 책도 있나요? 옛날 책.”
“네. 원본이 사라져서 번역본만 남아 있는 책도 있습니다.”
“번역본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원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건 누구나 바로 알 수 있어요. 번역은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와 같거든요. 뭔가 후두두 돌멩이가 떨어지는 느낌이 드니까 알 수 있어요.”
“바다에는 가지 않는 편이 나아요.”
그런데 삼십을 다 세고 일어서자 날이 밝았다. 놀라서 책상으로 돌아오자 원고지가 그대로 쌓인 채 있었다. 창밖을 봤더니 바나나 밭은 지평선 근처까지 멀리 가 있었다. 동쪽 하늘에는 상처 딱지를 연상시키는 검붉은 구름이 떠 있었다. 뜯어 보고 싶을 정도로 풍성한 딱지였다. 나는 급히 원고지를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그랬더니 내가 왜 원고지를 삼각형으로 접었지 하고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서 봉투를 다시 열어 원고지를 꺼내 봤더니 삼각형이 아니라 제대로 사각형으로 접어져 있었다. 그러나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건 당연하다면 당연했는데 나는 제목을 번역하는 걸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제목은 내일 전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원고지 말미에 만년필로 그렇게 쓰자마자 나는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수성잉크 펜은 절대 쓰지 마세요.” 하고 편집자가 전화로 말했던 일이다. “괜찮지 않나요? 비행기니까 바다에 떨어져 글자가 번질 염려도 없고.” 내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에이 씨가 나중에 말해 주길 그 일로 편집자는 화가 나서 내가 고약한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수성잉크를 편집자가 본다면 분명히 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할 터였다. 이제 와서 전체를 다시 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우체국 직원이 나 때문에 특별히 딱 아홉 시에 창구를 열어 주겠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 마음을 배신하기는 괴롭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 해도 그 직원은 내 일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섬사람인데 직원의 마음을 배신하면서까지 잉크 종류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수성이 뭐 어떠냐며 나는 잡아뗐다. 수성이어도 괜찮다. 번질 것은 스스로 번진다. 사라질 것은 스스로 사라진다.
성 게오르크가 있었다. 길 양쪽 가득히 팔을 벌려서 미소 짓고 있었다. 아까 청년과 달리 좀 퉁퉁했다.
“봉투는 이쪽으로 넘기시지. 가지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나는 길에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 일어서지 못 할 정도로 무릎의 힘이 빠져 버렸다. 남자는 눈동자를 동글동글 굴리면서 말했다.
“뭐야.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농담이야.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해. 화가 좀 나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니까. 여행 일정을 거짓으로 말했잖아. 그래서 화가 났어. 그뿐이야. 이제 됐어.”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모두에게 여행 일정을 거짓으로 말했다. 다른 섬의 이름까지 들먹여서. 하지만 공항에서 게오르크의 친한 친구와 딱 마주쳤을 때는 이제 안 되겠다며 그만뒀다.
“자, 일어서시지. 이제 됐어. 에스프레소라도 마시러 가서 서로
푸는 게 어때?”
남자는 내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고 나는 남자의 두툼한 가슴에 파묻혀서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유칼립투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우체국 뒤에 있는 카페이자 바였다. 들어간 순간 홰에 앉은 새처럼 앉아 있는 남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파파야 리큐어 냄새가 주위에 그득했다.
나는 카운터 뒤쪽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들어갔더니 파리 떼가 땀이 밴 목덜미에 모여들었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땀을 핥더니 그걸로 모자란지 내쳐도
내쳐도 뱅뱅 날아올라 공중에서 원을 그리고 나서는 다시 내려왔다. 화장실 안쪽에는 예상대로 뿌연 유리 창문이 있었다. 창문을 밀었더니 잠겨 있진 않았다. 나는 그 창문을 통해 밖으로 기어 나가 상반신이 밑을 향하게끔 떨어졌다. 떨어진 곳은 쓰레기 더미 같은 데였는데 썩은 과일 껍질이 기분 나쁘게 나를 감쌌고 파리 떼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거기서 당황한 나머지 몸을 일으키려고 너무 빨리 움직인 것이 실수였다. 옆으로 넘어져 머리가 부드러운 뭔가에 박혀 버렸다. 콜타르*
쓰레기 더미는 우체국 뒷마당까지 이어졌고 그곳을 가로지르면 자전거 주차장이 나왔다. 주차장에는 자전거가 한 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야자수가
한 그루 있었고, 그 야자수 뒤에 숨은 듯이 우체국 문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우체국은 물에 잠겨 있었다. 곳곳에 탁하게 고인 물이 있었고 그 속에 더러워져서 옅은 갈색이 된 종잇조각들이 수도 없이 떠 있었다. 입구 근처에서는 고무장화를 신은 또 한 명의 성 게오르크가 펜싱에서 쓸 법한 가는 칼로 계속 뭔가를 찌르고 있었다. 그 ‘뭔가’는 검붉은 색이었는데 고양이처럼 작았다. 그것은 반항하려는지 도망가려는지 탁한 물을 튀겼고 깔개의 자투리처럼 형태도 분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동물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 게오르크는 심심풀이하듯이 실컷 칼을 휘두르더니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미친 듯이 찔렀다. 성 게오르크는 때때로 으르렁대고 환성을 질러 댔는데 그 ‘뭔가’는 전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원래 동물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벌써 죽었던가 둘 중 하나인 낌새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이 보였다. 그런데 성 게오르크는 열심히 계속 칼을 휘둘렀다.
“직원은 어디 있지?”
나는 물었다. 성 게오르크는 손을 멈추지도 나를 보지도 않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집에 갔습니다.”
나는 창구 안쪽에서 우표 상자를 열어 항공우편 봉인 스티커, 속달 봉인 스티커를 뒤적거리다가 곧 내가 우표를 찾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표는 없었다. 지금 바로 봉투를 보내야 하는데 우표가 없다. 나는 탁한 물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뭔가’를 다시 한번 지켜봤다.
“설마 그게 내 살점은 아니겠지.”
나는 물었다. 그러자 성 게오르크는 “설마.” 하고 쾌활하게 웃으며 기품 있게 대답했다.
그때 나는 무서운 사실을 알아챘다. 봉투가 없어진 것이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건 축축한 양탄자 조각이지 봉투가 아니었다. 나는 양탄자 조각을 발밑에 버리고 서둘러 뒷마당으로 나갔다. 아마 쓰레기 더미에서 잘못 집은 것 같다. 쓰레기 더미 쪽으로 급하게 가 보니 내 시야를 가리듯 누가 서 있었다. 좀 전의 남자가 에스프레소가 든 작은 커피 잔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서 있었다. 잔에서는 김이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지?”
먼젓번 친절한 목소리가 아닌, 깊이 잠긴 무서운 목소리였다.
“왜 창문에서 밖으로 도망쳤지?”
나는 다시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변명을 해서 속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스타트는 민첩하게 끊었건만 뚝 하고 복사뼈에서 소리가 나면서 곧 넘어질 태세였다.
“넘어져 버려.”
뒤에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안 넘어졌다. 넘어지지 않고서 우체국으로 뛰어들었다. 좀 전의 성 게오르크는 이제 없었다. 그 대신
성 게오르크가 서 있던 곳의 탁한 물이 색깔이 바뀌어 거무스름한 붉은 색이 돼 있었다. 나는 물을 튀기며 입구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신발이 젖었고 끈이 조금 풀어져 막 벗겨질 참이었으나 내게 신발 끈을 다시 묶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신발 끈이 풀린 채로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그쪽을 향한 이유는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언덕을 뛰어 올라갈 힘은 없었고 그저 기계적으로 다리를 좌우로 움직이고 교대로 내밀며 언덕을 내려갔다. 곧 모래밭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으면 바다가 나오고 막바지에 이르게 된다. 양쪽에는 방파제와 숙박 시설이 막고 있어서 직진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나는 바다에 들어가야만 할지도 모른다.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만. 왜냐하면 나는 수영을 25미터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 나는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어딘가로 도망가겠지. 그건 바다가 눈앞에 나타나야만 알 수 있다. 바다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나. 바다는 머나 멀지 않나.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계속 언덕 아래로 달려갔다.
제안들 37
다와다 요코
글자를 옮기는 사람
유라주 옮김
초판 1쇄 발행. 2021년 4월 5일
발행. 워크룸 프레스
편집. 김뉘연
제작. 세걸음
ISBN 979-11-89356-52-1 04800
978-89-94207-33-9 (세트)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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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만 나아가는듯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잠시 멈춰 주변을 둘러보며,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갈래의 길이 각자의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한글꼴연구회는 이제 그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글자의 행적을 따라가며 지금까지 걷던 길과 다른 길을 모험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읽히고, 쓰이고, 그려지고, 엮이는 글자는 다가오는 변화에 적응하며 시대를 가로지른다. 글자의 ‘형태적 적응’, ‘공유와 소유’, ‘매체 확장’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종이를 출발점으로 변화하는 매체 및 기술에 대응하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준다. ‘AR’과 ‘글자 도구’를 이용한 두 가지 워크숍은 지면을 벗어난 글자에 대한 실험을 담고 있으며, ‘한글꼴 연구회 30주년’은 새로운 모험을 가능하게 한 한글꼴연구회의 지난 발자국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종이는 우리의 담론이 놓이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으로 재설정되며 앞으로 다양한 매체를 오갈 한글꼴연구회의 출발점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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